항목 ID | GC088004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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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忠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543년 - 김충수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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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김충수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움 |
몰년 시기/일시 | 1597년 - 김충수 사망 |
부임|활동지 | 부임지 -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
부임|활동지 | 활동지 -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나주 |
대표 관직 | 호조참판 |
[정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키고 순절한 공신.
[개설]
김충수(金忠秀)[1543~1597]는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 휘하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정유재란 때 다시 창의(倡義)하여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가계]
본관은 나주(羅州), 아버지는 김제군수 김적(金適)이다. 부인 금성 나씨는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1485~1551]의 손녀이다.
[활동 사항]
김충수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전라도 무안 출신이다. 1558년(명종 13)에 생원에 입격한 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동생과 처남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군량과 군수물자를 모집하여 병력을 지원하자, 그 공으로 온양군수에 제수되었다. 이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녹훈(錄勳)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제수(除授)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에는 1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관군과 합세하기 위해 이동 중 무안의 몽탄강(夢灘江)을 거슬러 올라온 적을 만나 분전하였으나 끝내 순절하였고, 부인 나씨는 남편을 감싸다 함께 죽고 말았다. 김충수의 두 아들 김천성과 김만성은 직산전투에서 탈출하여 충청도 공주와 보령 일대에서 거주하였고, 그 후손들이 보령에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다.
[상훈과 추모]
가선대부의정부우참찬겸지의금부오위도총부도총관(嘉善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義禁府五衛都總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 1704년(숙종 30) 창건한 우산사(牛山祠)[현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매을마을 소재]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