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진주성 전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56
한자 保寧 晉州城 戰鬪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문광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3년 6월 21일연표보기 - 보령 진주성 전투 발발
종결 시기/일시 1593년 6월 29일연표보기 - 보령 진주성 전투 종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 1월 21일 - 진주성 사적 제118호로 지정
발생|시작 장소 진주성 -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정의]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보령현감, 남포현감 등 충청도 병력이 참전한 2차 진주성전투.

[개설]

경상도 진주성에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1537~1593], 경상우병마절도사(慶尙右兵馬節度使) 최경회(崔慶會)[1532~1593]를 비롯한 경상도 병력과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황진(黃進)[1550~1593], 보령현감 이의정(李義精)[1555~1593], 남포현감 이예수(李禮壽)[?~1593] 등의 충청도 병력이 일본군과 싸운 전투이다. 1592년(선조 25) 김시민이 진주성에서 일본군을 막아 낸 진주대첩(晉州大捷)과 구분하기 위해 각각 1차 진주성전투, 2차 진주성전투로 구분한다. 일본은 진주대첩의 설욕, 명과의 강화(講和) 논의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9만여 명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이를 격퇴하기 위해 분전했하였으나 끝내 진주성이 함락되어 패전하였다.

[역사적 배경]

1593년(선조 26) 일본군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에게 평양성전투(平壤城戰鬪)에서 패배하면서 전세(戰勢)를 빼앗겼다. 평양성전투로 일본군은 한양으로 후퇴하게 되었으며 행주대첩(幸州大捷) 등의 패전이 이어지면서 경상도로 후퇴하였다. 조선 전역에 흩어져 주둔하던 일본군은 부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동남 해안에 주둔하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는 앞선 진주대첩의 패배를 설욕하고 명과의 강화(講和) 논의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진주성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일본군은 9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명은 일본과의 회담을 이유로 전투를 피하고자 했고,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전라순찰사 권율(權慄)[1537~1599]은 일본군의 대군을 보고 전라도로 후퇴하였다. 이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이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의병장 고종후(高從厚)[1554~1593] 등과 함께 진주성에 입성하여 일본군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당시 진주목사였던 서예원(徐禮元)[?~1593]은 원병으로 온 명의 장수를 접대하는 일로 머물다가 적의 소식을 듣고 급히 전투에 참가하였다. 진주성의 책임자인 진주목사가 지휘할 채비를 갖추지 못해 방어 병력의 지휘는 의병장 김천일이 맡게 되었다. 진주성을 방어하는 조선군의 방어 병력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우나 최대 1만 5천 명을 넘지는 않는다.

6월 21일 9만여 명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조선군은 진주성의 방어 시설과 의병, 주민들이 합심하여 27일까지 항전하였다. 그러나 진주성은 29일 왜군의 병력과 전술, 폭우로 인해 성벽이 무너지면서 함락되었다.

[경과]

충청병사 황진은 5월경 경상도로 퇴각하는 일본군을 쫓아 출병하였다. 황진은 도원수 김명원, 전라순찰사 권율과 함께 출병하였으나, 이들이 전라도로 퇴각한 것과 달리 진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입성하였다. 명이 일본과의 강화를 이유로 진주성의 구원을 거부하면서 당시 조정은 진주성을 방어하자는 논의와 병력을 후퇴시켜 방어해야 한다는 논의가 충돌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권율, 곽재우(郭再祐)[1552~1617] 등도 병력의 차이와 진주성의 상황을 이유로 전라도로 후퇴하여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충청병사 황진은 영남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전라도를 방어할 거점인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충청도의 병력을 이끌고 입성하였다. 이에 대해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를 보면 의병장이었던 곽재우가 황진을 만류하는 내용이 있다. 곽재우는 진주성이 외로운 성이므로 지킬 수 없으며, 황진은 충청도병마절도사를 맡고 있으므로 진주를 지키다 죽는 것은 직분에 맡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황진은 만류를 뿌리치고 진주성을 방어하기 위해 입성하였다. 황진은 진주성 방어를 위해 항전하다 6월 28일 이마에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6월 29일 진주성이 함락되었고, 진주성 방어를 위해 참전한 보령현감 이의정, 태안군수 윤구수(尹龜壽), 당진현감 송제(宋悌) 등도 전사하였다.

[관련 기록]

『선조실록(宣祖實錄)』 26년, 7월 16일에 충청도 수령들이 병력을 이끌고 참전한 기록이 나타난다. 황해도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이 작성한 장계(狀啓)에 충청도 수령들이 진주성전투에 참전하여 싸웠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장계에는 진주성에서 탈출한 보령 출신의 정로위(定虜衛) 인발(印潑)[1570~1636]의 증언이 있다. 이것은 충청병사 황진, 보령현감 이의정, 남포현감 이예수 등이 참전한 것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보령현감 이의정에 대한 기록은 『선조실록』 26년 11월 14일에도 있으며,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1533~1592] 등의 인물들과 함께 나라에 몸을 바쳐 절의(節義)를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관련 문화재]

진주성임진왜란 시기 진주대첩을 비롯한 1, 2차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진주성은 내수문, 외수문, 암문, 장대, 포루, 촉석루, 진남루 등이 남아 있다. 관련 기록물로는 「진주성도」가 있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도 진주성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2차 진주성전투는 충청도 병력이 병력의 열세와 전황의 불리에도 영남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전라도를 방어할 거점인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전투이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점령하였으나 전투에 의한 피해가 커서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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